찻잔 온기 품은 인사동 귀천, 다시 걷는 길
인사동 좁은 골목에 낡은 찻집이 있습니다. 이름은 '귀천', 시인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지키던 곳입니다. 천상병은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시를 썼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이 골목을 매일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고(故)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귀천 1호점'은 목 여사 별세 후 2010년에 정리되었으나, 이후 고인의 조카인 목영선 씨가 운영하던 '귀천 2호점'이 그 정신과 명맥을 이어받아 지금도 인사동(종로구 관훈동)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나 다시 그 골목 앞에 섰습니다. 그땐 몰랐던 골목이 이제는 낯익습니다. 문 손잡이는 바뀌었지만, 찻잔을 쥐면 손이 따뜻해지는 건 그대로였습니다. 요즘은 눈이 침침해서 글씨를 보려면 눈을 가늘게 떠야 합니다. 무릎도 예전 같지 않아 문턱 하나 넘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도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면, 잠깐은 시간이 멈춥니다. 따뜻한 것 하나로도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그 온기 속에서 잊고 지낸 골목 냄새가 다시 납니다.
그때는 몰랐던 게 있습니다. 골목을 무심히 지나던 제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저를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심했던 그 시절도, 사실은 누군가의 눈길 안에 있었습니다. 그 골목을 다시 걷는 것만으로, 그날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다리가 놓입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마주 보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것도 한 가지 만남입니다.
찻잔의 온기
골목 끝 낡은 문 앞
소년은 한 번도 안 멈췄다
시험지 무게만 메고
찻집 불빛을 그냥 지나쳤다
이십 년 뒤 같은 자리
손끝이 떨리며 문을 연다
찻잔 온기를 만지면
지나간 무심함도 따뜻해진다
빈 잔에서 김이 오르고
나는 처음으로 골목 소리를 듣는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8)
찻잔과 함께하는 쉼표
무릎이 전 같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몸은 변해도, 마음이 머물던 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문턱 하나 넘는 데 시간이 걸려도 됩니다. 눈이 침침해 글씨를 천천히 읽어도, 그 덕분에 못 보던 풍경이 보입니다. 손이 떨려 찻잔을 두 번 고쳐 쥐어도, 찻잔 속 온기는 그대로 당신을 기다립니다. 오늘 몸이 느려졌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느려진 만큼 더 오래 머물 시간이 생긴 것뿐입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찻잔에 담고 싶은 말
그 골목을 같이 걷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가끔 생각합니다. 곁에 남은 사람이 줄어 마음이 허전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처럼 찻잔 하나 두고 누군가와 마주 앉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말이 없어도 됩니다.
먼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는 마음도 결국 같은 온기에서 나옵니다. 당신 곁에도 찻잔 하나 내어줄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겁니다.
너무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도 지금, 당신처럼 찻잔을 만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