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의 시간을 건너온 이름 없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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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시내의 어느 사우나, 따뜻한 온탕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후끈한 열기가 온몸의 긴장을 풀어줄 무렵, 낯선 청년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와 인사를 건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맑은 눈빛을 가진 청년.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데, 도무지 그 이름 석 자가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 떠오르질 않습니다.
"아, 내가 너를 어떻게 불렀지?"
당혹스러운 마음을 담아 되묻는 나의 목소리가 온탕의 습기에 젖어 낮게 깔립니다.
2학년 송화초교의 개구쟁이
청년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20년 전, 춘천 송화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 반이었던 아이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20년 전 교실의 풍경이 마치 어제 일처럼 온탕의 수증기 사이로 피어오릅니다.
그 아이는 말끝마다 "헐"이라는 꼬릿말을 더해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헐"이란 여우꼬리를 달게 되었습니다.
작은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떠들던 아이들, 운동장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뛰놀던 그 맑은 얼굴들. 그 소란스럽고도 눈부셨던 시간의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그 아이의 얼굴 위로 2학년 시절의 풋풋한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이름 없는 기도의 자리
주님, 저는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겠노라 다짐했던 그 시절의 마음은, 20년이라는 긴 시간의 파도에 씻겨 내려갔나 봅니다.
청년의 이름을 부르지 못해 당황하던 그 순간, 저는 제 마음이 얼마나 무뎌졌는지 깊이 깨닫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 이름을 즉각 부를 수 없으나, 20년 전 그 아이를 바라보며 품었던 교사로서의 순수한 사랑만큼은 오늘 이 온탕의 온도처럼 여전히 뜨겁게 남아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이름 대신 마음을 부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이름을 부르고, 또 잊히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와 나누었던 시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름을 잊은 당혹감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다시 바라보는 기회를 얻습니다.
청년의 이름 석 자가 무엇인지보다, 20년이 지난 지금 어엿한 청년이 되어 선생님을 알아보고 먼저 다가와 준 그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더 깊은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춘천의 사우나에서 마주한 이 짧은 재회는, 커피보다 더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 청년의 앞날에 평안이 깃들기를 마음으로 가만히 불러봅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멋지게 자라나 다시 곁을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