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잔 하나에 그 사람의 목소리가 차오른다

관사 방에 놓인 막걸리잔 둘과 김치 한 보시기

양구군 해안면, 벽지학교 관사 안에 막걸리 두 병과 김치 한 보시기를 올려놓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전라도 장성이 고향인 그 친구는 군 시절을 인제에서 보내고는, 여기가 살기 좋다며 그대로 눌러앉은 사람이었습니다. 좁은 관사에 마주 앉으면 잔은 늘 두 개였고, 양은 쟁반 위 김치는 늘 한 접시뿐이었지만 막걸리는 줄어도 이야기는 줄지 않았습니다. 별 이야기, 역사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가 창밖 가로등이 꺼지고도 한참을 더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는 춘천에 있고, 그 친구는 인제 서화 시골학교에 근무 중입니다. 같은 강원도 안인데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거리가 그 사이에 들어선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그 저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 채워졌던 잔은, 비워진 뒤에도 그 자리를 기억합니다.

막걸리잔 둘이 하나로 줄어도 그 저녁은 줄지 않는다

요즘 저는 혼자 잔을 채우는 날이 더 많습니다. 마주 앉을 사람이 없어도 잔을 두 개 꺼내놓는 버릇은 여태 고치지 못했습니다. 빈 잔에는 먼지가 앉고, 채워진 잔에서는 김이 살짝 오르다가 식어갑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시골학교 관사에서, 누군가와 또 다른 막걸리잔을 채우고 있을지 모릅니다. 벽지에서 벽지로 옮겨 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내는 일이 우리 같은 처지에는 드물지 않습니다. 발령장 한 장이 사람을 이쪽 산골에서 저쪽 산골로 옮겨놓을 뿐, 함께 나눈 마음까지 옮겨놓지는 못합니다.

해안면 그 좁은 관사에서 별을 보던 그 밤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잔 속에 가라앉은 막걸리처럼, 말없이 그대로 고여 있을 뿐입니다. 가끔 비슷한 시각, 비슷한 자리에 앉으면 그날의 잔 소리가 귓가에 다시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막걸리잔 둘

해안면 관사에
막걸리 두 잔
별을 안주 삼아
밤이 깊어갔다

지금은
잔 하나만 채워도
그 사람 목소리가
잔 속에 차오른다

만나지 못해도
잔은 그 자리에
비워진 채로
가득 차 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잠언 17:17)

오늘 방에 앉는 시간

오래 앉아 있으면 무릎이 뻐근해집니다. 한 시간에 한 번쯤은 일어나 방 안을 천천히 걸어보세요. 어깨가 굳었다면 양손을 가볍게 돌려 풀어주세요.

저녁 공기가 차가워질 때는 무릎 위에 얇은 천 하나만 올려도 한기가 덜합니다.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나는 저녁이라면, 안주는 가볍게 김치 한 조각이면 충분합니다. 빈속에 들이켜기보다는 두어 숟갈 밥을 먼저 뜨고 나서 잔을 드는 쪽이 다음 날 속이 편합니다.

자주 못 만나도 잔은 그대로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좁은 방을 함께 쓰던 사람이 있습니다. 별 이야기를 나누고, 역사를 이야기하고, 살아온 날들을 풀어놓던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저녁의 온기는 잔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만나지 못한 시간이 길어졌다고 그 사람이 멀어진 것은 아닙니다. 산길이 가로막고 있을 뿐, 그날 나눈 말들은 여전히 가까이 있습니다.

오늘 누군가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면, 짧은 안부 한 줄을 건네보세요. 전화를 거는 일이 어렵다면 문자 한 줄도 괜찮습니다. 비워둔 잔 하나가, 다시 채워질 자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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